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더러운 전쟁 (문단 편집) === 죽음의 비행 === >'''아르헨티나 군대가 나치보다 더 나쁜 짓을 했다.''' >---- >전직 아르헨티나 해군 장교 아돌포 실링고(Adolfo Scilingo, 1946~)가 1994년에 한 회고 중[* 실링고는 당시 인권 탄압에 직접적, 적극적으로 개입하여(인정된 혐의만 해도 30건의 살인, 93건의 상해, 255건의 테러, 286건의 고문에 달한다) 2007년 7월 4일에 스페인 대법원으로부터 '''1084년형'''을 선고받은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마저 이런 말을 남겼다. 참고로 실링고는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의 악행들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군부 인사였다.] 비델라 정권은 반정부 인사들에게 '다른 감옥으로 이송 예정이다', '곧 석방될 것이다'라고 속여서 안심시킨 뒤,[* 비델라 정권은 이들을 속이기 위해 배경으로 신나는 음악까지 깔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피해자들은 '다른 감옥으로 이송 예정'이라는 말에 자유가 찾아올 줄 알고 기쁨의 춤을 추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백신]]이라고 속인 채 전신 마취제를 주사해 피해자를 재운 후 옷을 벗긴 채 마약을 먹이고 컨테이너에 몰아넣거나 양쪽 발을 시멘트로 굳히기도 했으며 추와 돌에 묶어 놓기도 한 뒤 형식적인 재판도 안 거친 상태로 [[헬기]]에 태워 산 채로 [[라플라타 강]]이나 [[태평양]], [[대서양]]에 던져넣어 반정부 인사들을 처형하는 일이 매우 흔했다. 물론 바로 옆 나라인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에도 '죽음의 비행'이 있었지만 비델라 정권은 한술 더 떠 아예 '죽음의 비행'만을 위한 '''전용 비행 대대'''까지 만들었을 정도였을 정도로 '죽음의 비행'을 즐겼다고 한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자행된 '죽음의 비행'으로 공식 수치로만 789명이, 일반적으로는 5000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2건의 '죽음의 비행'에 참여했던 아돌프 실링고의 증언에 따르면, 1977년부터 1978년까지 매주 수요일에 비행이 있었고, 한 비행에서만 17명이 사망하는 일도 있었으며, 그 기간 동안 총 180~200번의 비행이 자행되며 1500~20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심지어 [[지적장애]] 때문에 7년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1971년에 정신병원에서 요절한 비델라의 아들인 알레한드로(Alejandro Eugenio Videla, 1951~1971)를 돌봐준 프랑스인 수녀 2명[* 레오니 듀케(Léonie Duquet, 1916~1977), 앨리스 도몬(Alice Domon, 1937~1977). 참고로 둘 다 '''비델라의 사촌'''인 이스마엘 칼카뇨(Ismael Calcagno) 신부가 이끄는 그룹의 일원이었다.]조차 단지 실종자의 행방을 알려달라는 요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1977년 12월 8~10일에 납치, 고문당한 뒤 12월 17~18일에 [[배은망덕|산 채로 바다에 투척당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 군부는 이들을 살해하기 전 뻔뻔하게도 이들이 몬토네로스(Montoneros)라는 페론주의 게릴라 조직에게 납치된 것마냥 조작하려고 조작 사진을 찍고는[* 몬토레노스 깃발 앞에 수녀들이 앉아 있는 모습의 사진이었다고 한다.] 이를 당당하게 [[프랑스]] 언론에다가 보냈으며, 비델라는 '''자기의 아들을 돌봐준 이 수녀들이 체포된 사실을 통보받았는데도''' 이들의 목숨을 구하려는 그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YOUTUBE(7njNDeiRy-4)] 당시 학살에 사용된 비행기가 이후 미국에 팔려 스카이다이빙에 사용되다가 더러운 전쟁의 만행에 경악해 더러운 전쟁의 실상을 추적해온 이탈리아의 사진작가에 의해 발견된다. 결국 미국에서 아르헨티나로 반환되어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의 범죄행각들을 전시한 박물관으로 넘겨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